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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항섭미술비평  2022년

최순민의 조형세계


조형의 변주를 이끌어가는 오각형의 이미지 그리고 ‘아버지의 집’


신항섭(미술평론가)


  현대미술의 가장 큰 공로는 재료를 개방시켰다는 데 있지 않을까. 캔버스 위에 그 무엇을 부착하더라도 하등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수백 년 동안 캔버스를 채워온 기름 물감, 즉 유채의 영역에서 벗어나 마침내 세상의 그 어떤 물질도 용인하게 된 건 현대미술의 가장 큰 성과이지 싶다. 재료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났을 때 작가의 상상력은 날개를 달고 무한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게 된다. 현대미술이 세상을 장악하게 된 건 창의성을 부추기는, 다양한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하게 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최순민의 작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흔한 표현으로 재료의 백화점이라는 표현이 억지스럽지 않다. 유채 물감이야 그렇다 치고, 아크릴 물감은 물론이요, 오일파스텔, 돌가루, 물감의 원료인 안료, 레진, 그 밖의 오브제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판화용 동판을 부착하고, 잡지를 절단한 자잘한 종이 파편들로 콜라지 하는 일도 적지 않다. 여기에다 작업 도구는 붓 이외에도 여러 가지 동판화 도구와 커터 칼을 사용한다. 

  그러고 보니 이들 재료 및 도구 가운데 그림 외적인 용도로 쓰이는 것들이 많다. 그리기, 즉 묘사기법과는 다른 결과물을 얻기 위해 선택된 도구들임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그리기라는 드로잉 또는 묘사중심의 그림과는 접근방식이 다른 것이다. 재현적인 그림에서 마치 실제처럼 보이도록 착각하게 만드는 일루전은 실상을 빙자하는 일종의 눈속임이다.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게 된 이후 그림은 일루전의 오랜 습속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풍부하고 다채로운 표현기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유채 물감 이외의 다른 재료를 이용했을 때 단지 새로운 재료의 개입만으로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니 현대회화는 부단히 새로운 재료를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는지 모른다. 기존의 작품과 다른 조형세계를 추구하는, 창작의 윤리성을 신봉하는 현대회화는 마치 거대한 용광로와 같다. 무슨 재료든지 새로운 표현이라는 전제 아래 제한 없이 흡수하고 작품을 토해낸다. 따라서 캔버스는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고 그 결과물을 제한 없이 용인하게 됐다. 그리하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짐짓 화려하고 거대한 현대미학의 탑을 세울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재료를 조건 없이 수용하는 현대미학에 매료되어 새로운 재료의 탐색에 나섬으로써 결과적으로 오늘과 같은 작업과 조우하게 되었다. 오브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형태의 공업생산품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회화에 적합한 형태로 재가공하는 방식으로 캔버스에 풍부한 표정을 곁들였다. 파쇄기로 자잘하게 자른 잡지와 같은 종이 파편을 캔버스에 나열하는 방식으로 빼곡히 채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판화용 동판을 바느질하듯 꿰매어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캔버스는 물감과 오브제가 뒤섞이면서 그림이 맞나 의심스러울 만큼 복잡하면서도 두텁게 보이는 화면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재료는 조형적인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무슨 재료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물성에 맞는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이 모색되기 마련이다. 오브제를 도입하고 다양한 표현기법을 응용하는 과정에서도 한가지 놓치지 않은 점은 회화적인 공간이었다. 그 어떤 재료를 이용하고 방법적인 새로움을 가져오더라고 궁극적으로는 회화적인 아름다움으로 귀결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켰다. 그러기에 어떤 재료를 이용하더라도 회화로서의 아름다움이 살아있다. 시각적인 이미지를 추구하는 회화로서는 당연시할 일이지만, 이를 망각한 그림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일까. 그는 재현적인 그림과는 다른 방식으로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탐색한다. 유채물감이나 아크릴물감과 같은 회화적인 재료와 함께 오브제를 이용하는가 하면, 새로운 재료의 고유한 물성을 표현적인 이미지로 변환하는 데 아이디어를 집중시켰다. 물감 이외에 돌가루나 안료, 그리고 레진과 같은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물성을 표현적인 가치로 바꾸어 놓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풍부한 시각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구조적으로 견고한 화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에게 캔버스는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촉매일 뿐이고, 온갖 재료를 사용하여 캔버스가 지닌 본래의 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유채물감만을 허용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남으로써 캔버스에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어느 형태의 그림이나 형식과 내용이 공존하지만, 그의 그림에 담기는 내용은 시각적인 이미지 외에 여러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물질로서의 특성, 즉 물성과 관련한 이야기들도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작품에는 마치 오래된 흙벽이나 시멘트 건물과 같은 질감이 드러난다. 손끝으로 만져도 그 질감이 느껴질 만큼 도톰하게 올라온 화면은 유채물감과는 확연히 다른 물성으로서의 가치를 제시한다. 단지 질감만을 얻기 위한 게 아님을 말하려는 듯, 화면은 두터우면서도 부드러우며 곱게 보인다. 그렇다고 흙손으로 마무리한 듯싶은 매끄러운 질감은 아니다. 흙 또는 시멘트를 여러 차례 반복해 바르는 가운데 형성되는 질감의 견고함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면의 표정은 돌가루를 비롯하여 오일파스텔, 레진 등 화면에 물질을 쌓아 올리는 듯싶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흙벽을 바르듯 덧쌓는 방법으로 차근차근 덮기를 여러 차례 반복함으로써 물질감과 함께 질감이라는 표정을 얻는다. 이 과정에는 시간이 축적되고 손의 노고가 쌓이는가 하면 정신 및 감정의 깊이가 형성된다. 단순히 물질로서의 가치만이 아니라 작업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여러 감정 및 의식이 개재됨으로써 시각적으로만 인지하기 어려운 심도가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면에 불러들이는 것은 몽당연필 모양의 오각형 이미지이다. 마치 창문처럼 보이는 오각형의 이미지는 몽당연필의 이미지와 유사하지만, 실제로는 오두막과 같은 집이다. 집으로서의 모양을 극단적으로 압축하고 단순화한, 끝이 뾰족한 오각형 모양의 집에는 그 하나하나에 적합한 이야기가 담긴다. 인물이 있고, 풍경이 있으며 기하학적인 이미지들이 기거한다. 그 이미지 대다수는 추억의 곳간에서 끄집어낸 것들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파편처럼 조합되면서 단편적인 이야기가 생긴다. 커다란 화면에 크거나 작게 그리고 다양하게 구성되면서 이야기의 공간은 더욱 확장된다. 복수의 오각형 집의 이미지는 저마다 다른 내용이 담기는 가운데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화음을 이룬다. 그게 몇 개든지 비례 및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구성적인 아름다움과 독립적인 작품으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킨다. 

  오각형의 집은 개별적인 형식미를 결정하는 요건이면서도 내용을 불러들이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는 오각형의 이미지를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다. 아버지는 그 자신의 신앙생활과 연계되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아버지의’는 소유격이 아니라, ‘아버지를 만나는 곳’을 뜻한다. 따라서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으로 이해해도 좋다. ‘작은 집’은 ‘작은 교회’일 수 있으며, 착한 이를 찾아오시는 ‘그리스도의 공간’일 수 있다. 또한 이 작은 집은 ‘소망의 집’이 되기도 한다. 더불어 오각형의 작은 집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일 수 있고, 추억의 풀어내는 공간일 수가 있다. 그 자신의 아주 사적인 공간이면서 진정으로 ‘아버지’와 소통하는 장소이다. 이렇듯이 오각형의 자그만 집은 많은 상징성을 지닌다. ‘아버지의 집’의 형태적인 특징인 오각형의 이미지는 내용을 담는 그릇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오각형의 집 안에 들어가는 시각적인 이미지는 소박하고 순진하며 순수한 어린이의 감성을 소박파적인 형상으로 끌어낸다는 데 있다. 재현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단순하고 간결하게 압축된 형상들은 어린이 그림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 추억과 관련된 이미지는 개략적인 이미지만으로 충분히 전달되기 때문일까. 이러한 이미지로 채워지는 오각형의 집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다채로운 조형의 변주가 일어난다. 여러 개의 오각형 집을 일렬로 간결하게 나열하거나, 화면 전체를 일정한 간격으로 구성함으로써 구성적인 아름다움이 생성한다.  

  화면 바탕이 워낙 견고하고 심미적인 깊이를 가짐으로써 그 위에 어떤 식으로 배치하고 배열하더라도 독립적인 하나의 작품이 나온다. 이는 비례의 문제이다. 어쩌면 그의 작업은 아름다운 비례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잘 가꾸어 놓은 바탕에다 어느 크기, 어느 위치, 몇 개의 오각형 집을 배치하느냐에 따라 작품 하나하나에 고유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는 조형의 변주이기도 하다. 특정의 조형언어를 어떤 방법으로 보여주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조형의 변주로 답할 수밖에 없다. 

  구성 및 구도의 변주는 현대미학의 가장 큰 선물이다. 그 또한 조형의 변주를 방법론의 하나로 받아들임으로써 현대미학의 큰 수혜자가 되었다. 그의 경우 잘 다듬어지고 견고하게 다져진 질감 및 화면구조는 심미적인 깊이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 화면 위에 오각형의 집을 얹는, 단순한 작업 과정을 통해 많은 작품을 얻을 수 있다. 이는 조형의 변주라는 현대미학의 방법론에 대한 절대적인 동의를 의미한다. 그는 변주의 미학을 방법론으로 채용함으로써 세련되고 아름다운 회화적인 조형공간을 무한히 확장해 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아버지의 집 비평   2009년
서성록 (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장난감같이 생긴 아기자기한 모양들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다. 그안에는 빨갛고 파랗고 노란 색깔들과 온갖 화려한 무늬들이 장식되어 있다. 금속조각이나 인조보석들로 치장한 최순민의 그림을 볼때면 십중팔구 두손에 과자를 가득히 움켜쥔 어린아이가 느끼는 그런 행복감에 젖는다. 
최순민이 작업의 레퍼토리로 삼아온 것은 다름 아닌 집이다. 힘찬 필선이 넘실거리는 수묵화풍의 회화작품을 해오다 2005년 이후에는 집의 이미지만을 집중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집만큼 든든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하루 종일 세파에 시달리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피곤이 싹 가시고 안도감을 갖는다. 이런 집에 대한 인식은 그의 작품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편안함을 주며 언제든지 돌아가고 싶은 예쁘고 아담한 집이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이미지들이다. 
이전에도 집을 그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일제때 활동한 김종찬의<토담집>(1939)은 쓰러져가는 흙으로 된 집을 보여준다. 말이 집이지 실상은 초라한 움막에 가깝다. 장욱진의 <마을>(1956)에도 집이 등장한다. 두 채의 집이 그려져 있는데 창문을 통해 한 사람씩 얼굴을 내밀고 있다. 한 사람 살기에도 버겁게 느껴지는 자그마한 집을 표현하였다. 향토적인 화풍을 선보인 박수근도 집을 자주 그린 편이다. 시골의 기와집과 초가집을 가리지 않고 그렸는데 논밭이 딸려 있거나 마당에 장독대가 있고 닭이 있는 전형적인 농촌 분위기를 잘 나타냈다. 이렇게 작가마다 집을 대하는 시각이 다르며 화풍에 따라 특색있게 조형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순민의 집은 어떤 모양일까? 서두에서 말했듯이 언뜻 보기에는 장난감같은 모양이다. 외양상 밝고 화려한 편이며, 종래의 화가들에 비해 서술이 배제되어 있고, 선과 면으로 간략히 요약되어 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가 집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모양이 집과 유사한 오각형이며 제목으로도 그것이 ‘집’이란 사실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은 집의 단면만 크게 확대하거나 실선으로 볼록하게 처리한 것, 심지어는 철선을 용접한 경우도 있다. 다양한 변형을 꾀하지만 대체로 그의 집모양은 일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많은 집 가운데서도 작가가 형용한 이미지는 다름 아닌<아버지의 집>이다. 작가는 스트라이프, 별, 도트와 같은 여러 장식과 칼라플한 색지 및 인쇄물을 이용해 집을 꾸민다. 영롱한 인조보석은 그림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흥겨운 노랫가락이 흘러나오는 잔칫집 분위기를 연출한다. 작가는 애당초 집의 구조와 세부를 재현하는데 신경을 쓰기보다 집의 이미지, 즉 집이란 어떤 곳인가를 더 강조하려고 애쓴 모습이다. 어떤 것은 궁궐같은 곳도 있다. 세모의 지붕과 듬직한 돌기둥, 그리고 본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별이 빛나는 하늘에 세워진 으리으리한 도성(都城)같은 곳도 있다. 
작가는 왜 이처럼 ‘아버지의 집’을 화려하게 꾸몄을까? ‘아버지의 집’이 대궐같거나 화려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새삼 이런 작업을 한 것같지는 않다. 그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집’이란 돌이나 목재나 대리석으로 만든 가시적인 집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거주하는 곳이란 상징성을 띤다. 그곳에서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감하며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연구해야할 신적 대상으로만 생각했지 우리가 머무를 곳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스러운 분으로 인식할 뿐 그분과 함께 산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윗은 이런 우리의 인식에 일침을 가하였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27:4) 
각종 위험이 도사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숨을 수 있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안식도 위로도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부와 향락에 올인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서 무언가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것은 ‘바람에 나부키는 겨’처럼 부질없는 짓이다. 행여 누군가의 말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사업의 실패로 낙심할 때 아무도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방치된다면 어떨까? 성경은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말한다. 우리 존재의 심연에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된 내면의 준비가 담보되지 않는 한 진전은 더딜 수밖에 없다. 그 사랑이 심겨진 것을 깨달을 때 그것은 자신과 남들에게 끝없는 기쁨과 새 힘의 출처가 된다. 
오늘도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최순민의 작품은 이런 사람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그의 집은 광채로 번뜩이고 기쁨이 넘쳐나는 곳이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4:14)을 보고도 무관심하거나 태연한 척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면 아버지의 집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같다. 우리 영혼이 새 기운을 얻고 싶을때 ‘하나님의 집’만큼 좋은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품안에 있을 때에만 맘 편히 안식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마치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편23편에 펼쳐진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여호와는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만족을 주시고 고요에 잠기게 하신다. 단순히 집을 제시하였을 뿐이지만 작가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 서 있을 때처럼 만족감과 행복감을 전달한다. 그 분의 집에 들어가 내내 살기를 바라는 마음, 세상에서 가장 평안하고 안전한 곳에 있을 때의 정조(情操)를 실어냈음을 뒷받침해준다.
사실 우리가 창조주의 영화로움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기는 어렵다. 색과 리듬감 만으로 그 상태를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적 상태를 시각언어로 바꾸는 제약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조형언어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화면을 들여다보면, 흰 바탕은 단아하면서도 포근하다. 질료감을 주려고 바탕에 하드보드를 깔고 다시 한지를 서너 번 입히고 그 위에 다시 페인트를 칠하거나 돌가루를 뿌려서 견고한 바탕의 느낌을 살려냈다. 말하자면 재료의 고유한 맛을 살려내면서 평면을 잘 가다듬어 내밀성을 잘 간직하도록 한 셈이다. 그리하여 배경의 충실함을 통해 주제의식이 분명해지도록 했다. 
작가는 마음의 은밀한 집을 보여준다. 그안에서 영원한 기쁨의 모형을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창조주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전에는 한번도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경험하는 순간이자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영원한 행복’과 ‘끝없는 안식’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은 “우주에서 가장 즐거운 분이시다. 그 분의 풍성한 사랑과 관대함은 그 분의 무한한 기쁨과 깊이 이어져 있다.” 우리가 가끔 경험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님은 자아내시고 바깥으로 유출시키시기에 우리는 기쁨과 사랑을 제공받는다. 최순민이 아버지의 집을 지극히 사랑스럽고 정성스럽게 꾸민 것은 실제로는 집 주인의 풍성한 사랑과 관대함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근래에 작가는 집 시리즈에서 정물로 소재를 약간 넓혀가고 있다. 작은 종이조각으로 된 모자이크식으로 바꿔 종전보다 훨씬 장식적인 느낌을 더하였는데 화분에 꽃과 식물이 자라는 것이라든지 물고기와 빵을 수북이 담은 광주리를 표현한 것 등 조밀한 짜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작품들의 제목은<선물>이다. 이미지는 살짝 다르지만 사실 작품상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아버지의 집>이 창조주의 영화스러움을 나타냈다면, <선물>은 은혜 충만한 세상을 나타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란 사실을 상기하면 모든 게 '선물'로 다가온다. 하나님이 이처럼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 베푸신 것은 그 분의 자비와 사랑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작가는 아마도 감사의 마음을 그림에 담지 않았나 싶다. 최순민의 그림에는 빵이든 열매이든 식물이든 풍족하다. 음식으로 치면 '성찬'이요 꽃으로 치면 '백화난만한 동산'이다. 그것을 단순히 꽉 찬 이미지로 파악한다면 작품이해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것은 마음에 그득한 충만한 은혜의 표시로 감사의 표시가 아닐까 싶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오병이어를 베푸셨던 것처럼 오늘도 가슴에 멍울이 든 우리에게 '영혼의 만나'를 제공하고 계심을 알게 해준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선물>임에 틀림없다.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Soonmin Choi’s Magnificent Spring Concerto

  Robert C. Morgan   2015년

While houses are often regarded as functionary places where people eat, sleep, and interact with one another, for many Koreans, houses are something more than just a domicile or fact of circumstance. The house represents a sensitivity of feeling with a lingering symbolic resonance deeply held within human consciousness, even as one may travel to another place. The house is a symbolic nexus of peace and quietude that reverberates  within our sense of well-being. The house is, in fact, our home. It is the central location that begets feelings of brightness and intimacy.  For this reason, houses in Korea, over centuries of time, hold a special significance. They are physical structures that carry a legacy of family histories. They include the process of living from day to day with parents, grandparents, and siblings,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over the course of years. The house in Korea is associated with warmth, security, happiness, grief, sorrow, pleasure, growth, withdrawal, evolution, realization, ecstasy, and much more. It is the place in the heart, a place that the mind will never forget. 

Soonmin Choi’s ongoing series (since 2005) of modestly scaled paintings and mixed medium works, titled My Father’s House, are about these kinds of memories. They express moments of sincere authenticity, in the purest sense. The bright colors and shapes held within Ms. Choi’s miniature houses suggest moments given over to heightened feelings of quiet celebration and ebullient fulfillment. Her paintings are fundamental statements of faith as to what it means to be alive, healthy, and thriving in the wanderlust of nature. They are visual statements that hold magical memories of her deepest feelings and, in this sense, they are ultimately works of art. They communicate the intimacy of human beings living together and the positive feelings toward one another. Even as the artist comments on the hardships and difficulties endured by her beloved Father as she was growing up and coming of age as an adult, Soonmin Choi’s paintings point in the direction of the ideal. 

The significant of these paintings goes beyond the obvious. They are neither avant-garde nor classical in their delivery. They are poetic works of art that transmit the truth of the artist’s presence. As one studies these forms, they offer a reminder of the subtle delivery of human experience through signs and symbols. They express an open-minded belief in the optimism of the human spirit. Soonmin Choi’s miniature houses are more than houses. They are signs of inexorable delight that tell us a tale about occupying planet Earth and importance of fulfilling nature’s purpose. 

Ms. Choi’s sensibility is a compassionate one. Her paintings fulfill one of the major paradoxes of art – that to feel compassion for others is find the passion to do one’s work. Through this energy, Ms. Choi has discovered a special way of working. She begins with a hard wood surface on which she layers sheets of hanji (traditional Korean mulberry paper), one over another. Often she will mix sand or grit from crushed rocks into her pigments and inks. Occasionally she will etch or scratch lines into the surface, which will become the ground on which her house reside. In the act of painting, Choi focuses on a very particular vocabulary of essential or “primary shapes.” The house is a child-like pentagon: the first symbol of a house, always with a peaked roof. Within these primary pentagon shapes, the artist will paint very thin multi-colored lines or bead-like swirls, applying one dot or dash at a time until the swirling sensation is visually complete. Sometimes the dots are infinitesimal Impressionist ones, barely visible, similar to the manner paintings used by the great French colorist, Pierre Bonnard. 

Other times the ground is dazzling in its multifarious density, its fine quality of richness, reminiscent of the soil necessary to gestate vegetable roots, ginger, and grapes. In these built-up fields, filled with a spacious, yet illusory depth, Soonmin Choi encounters a coy resemblance to the work of Jean Dubuffet’s Readings of the Soil (1957). In each case, the tenacity of the ground reveals an expressive quality that holds defiance with nature, a statement of eternal presence that the soil offers in relation to sky and water, fire and air. These are the elements of the environment that surround the preeminent house and the neighborhoods culled from the imagination.

There are circles and rings often seen in My Father’s House. Often Choi’s fastidiously designed houses with stand independently and other time in groups or with a smaller house turned sideways. On some occasions, one will confront angular planes in primary colors – a wedge of blue or yellow or red – encroaching from the side of the painting or emanating from one of the corners. A small chirping bird occasionally appears either outside or within the house. The bird carries an important presence of ongoing life and hope, the tactile and ethereal substance of joy. It offers a transensory sign that moves from vision to sound, the gentle sound of a beautiful spring day, which is, in fact, the metaphor that transmits throughout My Father’s House.


Scholar, poet, artist, curator, and critic, Robert C. Morgan writes frequently on the art of contemporary Chinese and Korean artists. He is the New York Editor of Asian Art News and teaches at the School of Visual Arts in New York. In 2005, Dr. Morgan was a Fulbright Senior Scholar in the Republic of Korea.

종교적 경험의 형태화  1997년
박영택/미술비평, 경기대교수

최순민은 자신의 내밀한 종교적 체험과 열정을 형태로서 경험시키고 있다. 자신의 종교적 경험이 형태화 된 것이 그녀의 그림인 것이다. 신념과 믿음을 가시적 존재로 만들어온 역사는 깊고 아득하다. 이미지는 특정한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결정(結晶)이 되고 이제 이미지 자체가 하나의 상징으로 그 세계를 대신한다. 그림은 하나의 응집되고 강렬한 표현으로 비가시적인 세계를 표현한다. 그림이란 이렇듯 보이지 않는 세계, 볼 섄릴 판은 닫혀있으면서 동시에 열려있는 화면이다. 안과 밖의 이미지가 중첩되고 교차하면서 또한 하나의 이미지가 무수히 많은 이미지로 증삭되고 분열하면서 확산된다. 일정한 규격을 지닌 이 사각형의 작은 화면은 하나의 설정공간이다. 그것은 규격이고 약속이다. 모든 회화는 그런 정해진 평면에 무엇인가를 표현한다. 작가에게 그 사각의 공간, 프레임은 자신의 내면세계와 종교성을 함축해내는 필연적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림은 현실 그 자체나 관념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거기에 무엇이 그려지는가는 시대나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회화의 설정성은 그래서 문제가 되기도 하고 그림의 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점이 회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화면은 자기에게 의미있는 세계, 또 다른 현실적 장이 펼쳐지고 자족하는 영역, 정신과 관염의 신체화가 되어 현존하지만 그것 자체는 결국 하나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분명 세계와 정신을 대신해서 눈앞에 실존한다. 작고 제한된 화면에 무엇인가 그려지거나 얹혀지면 그 즉시 새로운 공간성이 생겨나고 그리고 그것은 그 외부와 특정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최순민의 화면은 이미지가 서식하는 평면, 피부이자 그 자체로 액자, 프레임이 된다. 화면과 프레임이 동시에 결합되어 있는 그런 그림이다. 화면이자 프레임이 되고 그 두 개가 더블이미지로 함께하며 겹친 음성, 메시지를 들려준다.


케이스가 수십 개 집적되어 부착되는가 하면 작은 캔버스의 평면 위에 케이스가 단독으로 올려져 있다. 작은 면들이 커다란 면을 형성하고 그것은 전체로 귀결되는 형국인데 그녀 작품의 주된 특징의 하나가 이처럼 작은 낱낱의 것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세계로 집적되는 스타일이 된다. 단일한 하나의 정신으로 모여 거대한 믿음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곤 그 개별적인 것들이 모여 닻(영혼의 닻)이나 십자가 혹은 예수그리스도의 얼굴 초상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림 곳곳에 머무는 흔적들은 물론 기독교적 내용을 이루는 상징체들이다. 물론 그런 내용은 다소 추상적이고 상징적이라 작품의 표면상으로 직접적으로, 명료하게 드러나는 편은 아니다. 


작가는 판화와 오브제를 활용해 자신의 특정한 종교적 관심과 믿음을 상징화시킨다. 그것은 개인에게 있어 미술행위이자 또 다른 맥락에서 종교행위이기도 하다. 이미지를 통해 자기 경험을 대상화한다는 것은 그것을 다시 생생하게 되살려내는 일이고 구체화시키는 한편 자기 믿음의 확인에 가깝다. 


그림이란 것 역시 현실에서 또 다른 현실을 지향하는 욕망구조를 반영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일종의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통해 믿음을 가시화 시킨다는 행복한 그림그리기를 행위한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그림이자 동시에 삶이고 종교 그 자체이다. 자신의 현실적 삶에서 의미있는 또 다른 삶의 확인이고 그 삶으로의 나아감이다.


작은 화면 안에 동판으로 찍어 만든 이미지는 에칭의 특징적인 맛이 감도는 그런 이미지다. 블랙에 대한 다채로운 맛, 깊이 부식해서 자연스럽게 생긴 자잘한 흔적들, 그런 재미와 효과가 매력적인 동판이다. 동판의 표면에 섬세하게 상처를 내고 흔적을 남기고 자국을 새긴 화면은 추상적이면서도 나름의 분위기를 짙게 반영한다. 동판은 무엇보다도 선이다. 그 선은 형태와 운동, 속도와 시간을 보여주기도 하고 섬세한 감정의 굴곡과 주름, 암시적인 상황과 모종의 분위기를 하나의 풍경처럼 펼쳐놓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다양한 감정의 진폭과 뉘앙스의 변화를 가시화 하는 데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그 사이로 십자가나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이 슬쩍 출몰하기도 한다. 찍힌 판화와 실선들의 교차가 한데 어우러진 작업에서 선들은 고난과 상처를 의미한다고 한다. 선은 형태를 흡수하고, 대신 형태가 갖는 재현의 요소는 새로운 선들이 갖는 표현의 요소들에게 자리를 내준다. 수없이 교차하는 선의 흐름, 흑백톤으로 물든 동판의 화면배경, CD케이스의 투명한 비춤, 안과 밖, 내면과 외면, 육체와 정신, 세속세상과 종교적 세계 등등의 경계가 그 화면/프레임 사이에 작동한다.


그런 면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화면/프레임을 자신의 주제와 적절하게 결합시켜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종교적 체험, 경험의 형태화가 관습화된 상징에 의존하고 있다는 아쉬움, 그리고 판화와 CD케이스의 연출이 좀 더 흥미롭게 구사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든다. 

미술비평란: 언론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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