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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택/미술비평, 경기대교수

최순민은 자신의 내밀한 종교적 체험과 열정을 형태로서 경험시키고 있다. 자신의 종교적 경험이 형태화 된 것이 그녀의 그림인 것이다. 신념과 믿음을 가시적 존재로 만들어온 역사는 깊고 아득하다. 이미지는 특정한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결정(結晶)이 되고 이제 이미지 자체가 하나의 상징으로 그 세계를 대신한다. 그림은 하나의 응집되고 강렬한 표현으로 비가시적인 세계를 표현한다. 그림이란 이렇듯 보이지 않는 세계, 볼 섄릴 판은 닫혀있으면서 동시에 열려있는 화면이다. 안과 밖의 이미지가 중첩되고 교차하면서 또한 하나의 이미지가 무수히 많은 이미지로 증삭되고 분열하면서 확산된다. 일정한 규격을 지닌 이 사각형의 작은 화면은 하나의 설정공간이다. 그것은 규격이고 약속이다. 모든 회화는 그런 정해진 평면에 무엇인가를 표현한다. 작가에게 그 사각의 공간, 프레임은 자신의 내면세계와 종교성을 함축해내는 필연적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림은 현실 그 자체나 관념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거기에 무엇이 그려지는가는 시대나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회화의 설정성은 그래서 문제가 되기도 하고 그림의 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점이 회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화면은 자기에게 의미있는 세계, 또 다른 현실적 장이 펼쳐지고 자족하는 영역, 정신과 관염의 신체화가 되어 현존하지만 그것 자체는 결국 하나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분명 세계와 정신을 대신해서 눈앞에 실존한다. 작고 제한된 화면에 무엇인가 그려지거나 얹혀지면 그 즉시 새로운 공간성이 생겨나고 그리고 그것은 그 외부와 특정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최순민의 화면은 이미지가 서식하는 평면, 피부이자 그 자체로 액자, 프레임이 된다. 화면과 프레임이 동시에 결합되어 있는 그런 그림이다. 화면이자 프레임이 되고 그 두 개가 더블이미지로 함께하며 겹친 음성, 메시지를 들려준다.


케이스가 수십 개 집적되어 부착되는가 하면 작은 캔버스의 평면 위에 케이스가 단독으로 올려져 있다. 작은 면들이 커다란 면을 형성하고 그것은 전체로 귀결되는 형국인데 그녀 작품의 주된 특징의 하나가 이처럼 작은 낱낱의 것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세계로 집적되는 스타일이 된다. 단일한 하나의 정신으로 모여 거대한 믿음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곤 그 개별적인 것들이 모여 닻(영혼의 닻)이나 십자가 혹은 예수그리스도의 얼굴 초상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림 곳곳에 머무는 흔적들은 물론 기독교적 내용을 이루는 상징체들이다. 물론 그런 내용은 다소 추상적이고 상징적이라 작품의 표면상으로 직접적으로, 명료하게 드러나는 편은 아니다. 


작가는 판화와 오브제를 활용해 자신의 특정한 종교적 관심과 믿음을 상징화시킨다. 그것은 개인에게 있어 미술행위이자 또 다른 맥락에서 종교행위이기도 하다. 이미지를 통해 자기 경험을 대상화한다는 것은 그것을 다시 생생하게 되살려내는 일이고 구체화시키는 한편 자기 믿음의 확인에 가깝다. 


그림이란 것 역시 현실에서 또 다른 현실을 지향하는 욕망구조를 반영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일종의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통해 믿음을 가시화 시킨다는 행복한 그림그리기를 행위한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그림이자 동시에 삶이고 종교 그 자체이다. 자신의 현실적 삶에서 의미있는 또 다른 삶의 확인이고 그 삶으로의 나아감이다.


작은 화면 안에 동판으로 찍어 만든 이미지는 에칭의 특징적인 맛이 감도는 그런 이미지다. 블랙에 대한 다채로운 맛, 깊이 부식해서 자연스럽게 생긴 자잘한 흔적들, 그런 재미와 효과가 매력적인 동판이다. 동판의 표면에 섬세하게 상처를 내고 흔적을 남기고 자국을 새긴 화면은 추상적이면서도 나름의 분위기를 짙게 반영한다. 동판은 무엇보다도 선이다. 그 선은 형태와 운동, 속도와 시간을 보여주기도 하고 섬세한 감정의 굴곡과 주름, 암시적인 상황과 모종의 분위기를 하나의 풍경처럼 펼쳐놓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다양한 감정의 진폭과 뉘앙스의 변화를 가시화 하는 데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그 사이로 십자가나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이 슬쩍 출몰하기도 한다. 찍힌 판화와 실선들의 교차가 한데 어우러진 작업에서 선들은 고난과 상처를 의미한다고 한다. 선은 형태를 흡수하고, 대신 형태가 갖는 재현의 요소는 새로운 선들이 갖는 표현의 요소들에게 자리를 내준다. 수없이 교차하는 선의 흐름, 흑백톤으로 물든 동판의 화면배경, CD케이스의 투명한 비춤, 안과 밖, 내면과 외면, 육체와 정신, 세속세상과 종교적 세계 등등의 경계가 그 화면/프레임 사이에 작동한다.


그런 면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화면/프레임을 자신의 주제와 적절하게 결합시켜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종교적 체험, 경험의 형태화가 관습화된 상징에 의존하고 있다는 아쉬움, 그리고 판화와 CD케이스의 연출이 좀 더 흥미롭게 구사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든다. 

종교적 경험의 형태화  1997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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